이덕무 선집 깨끗한 매미처럼 향기로운 귤처럼

깨끗한 매미처럼 향기로운 귤처럼(이덕무 선집) 

 

 

 

* 여름날 한가히

 

  앓은 뒤 일어나니 시원한 대자리도 꺼려지는데

  향 피우고 앉았으니 청명한 날씨가 외려 기쁘네

  어리석은 사람이야 돈밖에 무얼 알랴

  선비는 한평생 책이나 볼 뿐

  외론 꽃에 볕이 깨끗하니 나비가 졸고

  먼 나무에 바람 자니 매미 소리 들리네

  붉은 술을 서글피 사 갖고 와서는

  커다란 근심을 씻어 보누나

 

* 나무의 마음처럼

  고관대작 이름을 나는 모르네

  내 아는 건 오로지 책 읽는 일뿐

  뜨락의 저 나무 내 마음 같아

  맑은 바람 맞으며 우둑 섰어라

 

* 가난과 독서

여종은 양식 없다 종일 종알대건만

고요한 방에 앉아 글 읽는 일 쉬지 않누나

온몸에 술을 저장할 수 있어도

어찌 차마 잠시라도 책 안 볼 수 있나

창에는 거미줄이 드리웠고

옷에는 좀벌레가 달아나네

한가하니 쾌활함이 더욱 깨달아

조그만 매화 정원 손수 김매네

 

* 봄, 여름, 가을, 겨울

봄

문 앞에 드리운 푸른 버드나무

아침 비에 ㄱ지 젖고 저녁 비에 뿌리 젖네

꽃에 물주고 와 홀로 턱을 괴고선

앉아서도 당시(唐詩) 보고 누워서도 당시 보네

 

여름

물가 정자 동쪽에 흰 비가 주룩주룩

이랑엔 벼가 가득 못에는 연꽃 가득

사립문 두드리며 동자를 부르는 이

고기잡이 늙은인가 나무꾼 늙은인가

 

가을

한가히 지내며 도연명 시 읽으니

술은 절로 소쇄하고 국화 절로 소쇄한네

저물녘에 돌아오는 고기잡이 동자는

멀리 또 가까이 강과 시내에서 고기 낚았겠지

 

겨울

매화 가지 잡으니 떨어지는 꽃이 찬데

정저에서도 들에서도 이리저리 서성이네

돌아오매 향이 하늘하늘 피어나니

한가한 밤도 기쁘지만 한가한 이 맘 더 기쁘네

 

 

* 산 글과 죽은 글

산 글이란 무엇인가?
자구마다 한결같이 그 정신이 유동(流動)해야만 산 글이라 할 수 있다.
진부한 것을 답습하기만 해서는 죽은 글이 될 뿐이다.
옛날의 6경 가운데 정신이 없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?

 

* 나 자신을 친구로 삼아

: 눈 오는 아침이나 비 오는 저녁에 다정한 친구가 오지 않는다면, 과연 누구하고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? 시험 삼아 내 입으로 직접 글을 읽어 보니 나의 귀가 들어주었고, 내 손으로 직접 글씨를 써 보니, 나의 눈이 보아 주었다. 내 이처럼 나 자신을 친구로 삼았으니 다시 무슨 원망이 있을 것인가.

 

* 가난

가장 뛰어난 사람은 가난을 편안히 여긴다.
그 다음 사람은 가난을 잊어버린다.
가장 못난 사람은 가난을 부끄러워해 감추기도 하고,
  남들에게 자신의 가난을 호소하기도 하고,
  그 가난에 그대로 짓눌리기도 한다.
  그러다 가난에 부림을 당하고 만다.

이보다도 못난 사람이 있으니,
  바로 가난을 원수처럼 여기다가 그 가난 속에서 죽어가는 사람이다.

 

 

* 책을 읽어 좋은 점 4가지

1. 약간 배가 고플 때 책을 읽으면 그 소리가 훨씬 낭랑해져 글에 담긴 이치를 맛보느라 배고픈 줄을 모르게 된다.

2. 조금 추울 때 책을 읽으면 그 기운이 그 소리를 따라 몸속에 스며들면서 온몸이 활짝 퍼져 추위를 잊게 된다.

3. 근심과 번뇌가 있을 때 책을 읽게 되면 내 눈은 글자에 빠져들고, 내 마음은 이치에 잠기게 되어 천만 가지 온갖 상념이 일시에 사라진다.

4. 기침 앓이를 할 때 책을 읽으면 기운이 통창해져 막히는 바가 없게 되어 기침 소리가 돌연 멎게 된다.

 

* 말똥과 여의주

말똥구리는 스스로 말똥 굴리기를 즐겨하여 용이 품은 여의주를 부러워하지 않는다.
여의주를 품은 용 또한 여의주를 뽐내면서 말똥구리가 말똥 굴리는 것을 비웃지 않는다.

 

* 싸움은 어디서 오는 걸까

‘너’와 ‘나’를 차별하는 마음을 잊기만 하다면야 싸움이나 전쟁이 어떻게 일어날까?

 

* 바로 이 3일

군자는 어제와 오늘과 내일, 바로 이 3일에 유념할 뿐이다.